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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괴를 통한 소수적 글쓰기의 실천



발터 벤야민은 1차 세계대전을 두고 불확실한 현재를 만든 가장 결정적인 원인으로 보았다고 한다. 온몸으로 전쟁을 겪은 당대인들에게 현재가 어떠했겠는가? 아마도 그것은 안개가 짙게 껴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상황과 같았을 것이다. 유럽 모더니티는 이렇듯 흐릿하고 불확실한 상태에서 탄생하였다. 전쟁의 폐해는 동시대인들이 꿈꿀 미래와 기억할 과거를 파괴하고 말았다. 따라서 과거와 미래의 목소리는 묵음처리 되었다. 다다의 반예술은 폭력의 문제를 반어법적인 방법으로 표명하였다. 다다이스트들은 신문과 책 속의 문장들을 오려 무의식의 흐름을 문맥과 의미와 상관없이 재배치하여 글쓰기의 형식을 해체함으로서 새로운 글쓰기의 가능성을 써내려갔다. 전주연의 작업은 다다의 실험을 연상시킨다. 끊임없이 의미의 텍스트에서 탈주하기 위한 부단한 노력은 도대체 무엇을 위한 행위일까?


전주연은 정치학을 공부하다가 미술로 방향을 틀었다고 한다. 정치학을 전공하는 과정에서 어떻게 언어에 대한 예민함을 가지게 되었는지를 묻지는 않았다. 하지만 평론가 이문정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언어에 대한 예민함은 그것으로 자신의 생각을 제대로 담아낼 수 없기 때문이라는 말은 상당히 긴 여운을 남긴다. <긴 몸을 가진 말들의 행적>(2014)은 사람들이 나누는 대화의 과정을 테니스 경기 장면과 연결시켜 말을 주고받는 궤적을 그린 작업이다. 인간은 평생 언어의 굴레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그러나 소통을 위하여 필요한 것은 유려한 언어 능력이라기보다 관계를 파악하고 조율하는 능력, 즉 통제의 기술을 익혀야 한다는 사실을 어느 사이 깨닫게 된다. 그렇다고 언어를 버린다고 해서 모든 게 해결되는 건 아니다. 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 자체가 또 다른 의미들을 생성시킨다. 따라서 언어에 있어서 듣기와 말하기 모두가 중요하다.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듣기와 말하기 사이에는 신체반응이 일어난다. 우리는 듣기만 하지 않는다. 읽기만 하는 것도 아니다. 바로 그 사이에서 몸이 등장한다. 말의 발화는 오랫동안 느꼈던 감정을 확인하는 순간이다. 누군가는 고백의 언어를 듣고 눈물을 흘리거나 뱃속에서 요란한 간지러움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언어는 절대 중성적이지 않다. 언어체계를 습득하는 과정을 떠올려보자. 옳은 것과 그른 것을 나누면서 언어사용에 있어서 어떤 질서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무의식적으로 배우지 않는가. 아마도 전주연은 애초부터 언어가 내포하고 있는 명령의 기제에 민감했던 게 아닐까? <긴 몸을 가진 말들의 행적>을 비롯하여 대부분의 작업들이 언어를 추상화하는 데에 집중되어 있다는 점도 우리가 살펴보아야 할 지점이다. 언어를 통한 소통과정에서 발생하는 서로의 요구의 내용은 모두 지우고 오로지 말들이 오고가는 궤적만을 그린다는 의도는 되레 언어를 작업의 소재로 사용하는 이유를 대변하는 듯하다. 어쩌면 언어가 자신을 어떤 식으로든 구속한다고 믿고 있었던 게 아닐까? 그래서 그의 작업은 언어에서 해방되기 위함이 아닌 비로소 자신의 언어, 타인과 대화하는 언어의 가능성을 찾기 위한 힘겨운 여정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언어는 삶이 아니다. 언어는 삶에 명령을 내린다.”


들뢰즈/가타리는 언어가 소통의 수단이라기보다는 기호체계에 더 가깝다고 보았다. 알다시피 구조주의 언어학은 언어활동을 랑그와 파롤로 구분하는데, 랑그는 하나의 규범이자 체계로서의 언어로 악보와 유사하고, 파롤은 랑그를 자신의 표현으로 사용하는 현실의 언어로 일반적으로 해석한다. 그런데 들뢰즈/가타리는 이러한 사유체재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언표와 행위의 관계를 잉여의 관계로 본다. 뉴스 기사를 예로 들어서 사건이 어떻게 흘러갈 것인지 관심을 가지라는 말은 의사소통이 아닌 생각을 하라는 암묵적 명령과 동일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개념을 화행론(speech-act theory)라 부르는데, 언어와 행동의 관계를 뜻한다. <Hitting>(2018)은 설치 과정과 퍼포먼스의 결과물로 언어와 그것의 해체에 관한 작업이다. 애써 문장을 차례대로 쌓은 후 그 뒤에서 줄넘기를 한다. 앞뒤로 회전하는 줄에 의하여 (의도적으로) 과거의 행위와 과거가 된 기록으로서의 문장은 해체된다. 이 역설적인 행위는 언어에 타격을 가함으로써 명령기제로서의 언어를 거부하려는 본능적 몸짓으로 해석할 수 있다. 문장이 적힌 막대가 쌓여지는 방식과 위치도 흥미롭다. 아래부터 위로 차례로 쌓아올린 문장이 적힌 막대의 면은 카메라를 향해 전면에 위치한다. 하나씩 쌓다보면 어느새 작가의 키보다 높은 블라인드와 같은 벽이 완성된다. 작가는 텍스트 장벽 뒤에서 줄넘기를 하면서 텍스트 장벽을 해체한다. <Field of Study>(2017)은 논고랑에 새싹을 심듯 곧추 세워진 녹색 계열의 글자들을 바닥에 여백 없이 빼곡하게 쌓은 작업이다. 텍스트는 이미 읽을 수 없는 상태다. 띄어쓰기가 되어 있지 않은 문장은 해독이 불가능하다. 그리스인들은 말로 소통하였다. 그들의 말은 아름다웠으나 구두점도 띄어쓰기와 같은 문법이 없는 상태여서 누구나 읽고 해독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들의 말을 그 자체보다 아름답게 만들어낸 사람들은 시리아인들이었다. 어떻게 이방인이 그리스어를 그렇게 훌륭하게 다듬어낼 수 있었을까? 모국어는 익숙한 것이기에 그 한계나 모순을 제대로 판단하기 어렵다. 노예가 된 지적인 시리아인들은 그리스 귀족의 대필 노예가 되어 그들의 말을 하나의 랑그가 될 수 있도록 다듬었다. 그렇게 표준이 되는 언어의 형태와 문법이 만들어진다. 형식이 배제되어 읽을 수 없는 텍스트는 말의 지위를 상기시킨다. 그것은 아버지의 목소리고, 남성, 권력자, 지배자의 목소리다. 이처럼 띄어쓰기와 구두점이 없는 텍스트는 작가가 느끼는 심리적 강박처럼 보인다. 따라서 심리적인 압박감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전주연은 텍스트 패드 위에서 줄넘기, 배드민턴, 테니스, 골프와 같은 신체활동을 한다. 흥미로운 점은 언어를 파괴하기 위한 신체활동이 건강과 연결된 행위라는 것이다. 작가의 의도를 직접 듣지는 못하였으나 행위의 상징성은 이 지점에서 더욱 명료해진다. 마치 언어가 건강의 적이라도 된 것 마냥. 한데 불안한 심리상태를 고조시키는 건 우리가 실제로 듣지 못한 숨소리일 것이다. 어쩌면 전주연 작업에서 가장 핵심적인 기제는 바로 ‘호흡’이 아닐까. 글씨더미 위에서 운동을 한다는 건,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스레 호흡이 점점 더 거칠어지기 마련이다. 호흡이 거칠어질수록 상대적으로 바닥의 글자들도 부서져 있을 테니 말이다. 그 인과관계가 다소 직접적이고 곧바로 드러나는 결과에 아쉬움도 남는다. 과연 언어는 작가의 공격에 순순히 항복할까? 그렇게 쉽게 언어가 추상이 되어버린다면 작업의 과정이 곧 결과를 위한 공정이 되어버리는 게 아닐까? 우리가 어떤 과정을 집중하면서 뒤따를 수 있는 동력은 시적 공명이 나타날 때 가능하다. 전주연은 시적 공명 대신 우화적 효과를 더 중요한 작업의 기제로 사용하는 듯하다. 공포, 두려움, 도전, 저항과 파괴의 과정이 소박하고 부드럽게 표출되는 건 그만의 특성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전 작업 <Aerotext>(2017)는 팽창된 반투명한 풍선 표면 위에 글을 쓴 후 수축된 풍선 위에 마치 주홍글씨처럼 새겨진 글의 흔적은 은유로 충만하다. 숨이 터질 것 같이 부풀어진 허파 속에는 내뱉지 못 한 말들이 가득 차있지만 그 말들은 긴 호흡을 뱉는 동안 추상이 되어 세상 밖에서는 말이 아닌 추상의 덩어리가 된 것만 같다. 반대로도 해석할 수 있다. 부풀어진 자아로 채워진 문장들은 마치 정치연설의 문구로 볼 수도 있겠다. 정치의 순간이 지나고 관료의 시간이 도래하면 이전의 부푼 희망은 어느 새 구겨진 채 버려지는 현실을 떠올릴 수도 있다. 


전주연이 문장의 질서를 의도적으로 파괴하는 행위는 글의 내용과 형식과는 무관한 문제로 보인다. 사실 문장의 파괴는 글쓰기의 일부로 볼 수 있다. 글쓰기를 넘어서는 욕망으로 가득 찬 연애편지는 쓰면 쓸수록 저자의 속마음을 곧이곧대로 보여줄 뿐이다. 남은 건 상대방에게 자신의 마음을 통째 들키는 것이다. 그래서 전주연의 행위는 문장 자체보다 그 행위에 무게가 실린다. 작가의 마음이 혹여 누군가에게 들킬까봐 읽을 수 없는 부서진 문장의 조각을 제시한다. 문장을 해독할 수 없음은 오히려 문장 자체가 아니라 전체를 다 읽을 수 없다는 사실에 더 큰 의미가 실릴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의 작업을 반대로 관측해 보고자 한다. 그의 근작들은 다소 직접적으로 언어의 외형 파괴에 집중되어 있다. 그러나보니 의미전달은 명확해지지만, 반대로 의미에 다가가는 정밀하고 섬세한 과정이 삭제되었다. 그런데 그의 작업이 무언가를 말하기 위함이 아닌 말하지 않음을 보여주는 과정이었다고 생각해보자. 즉, 언어의 파괴가  목적이 아닌 언어에 내재하는 정치성과 다수성으로부터 탈주하려는 시도를 떠올려볼 수 있다. 전주연이 영어권 국가에서 유학을 중도포기하고 되돌아온 후 굳이 영어를 주 언어로 사용하는 작업을 지속하는 점은 눈여겨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이 지점에서 언어와 식민주의의 관계가 형성되기 때문이다. 한국사회에서 영어가 갖는 의미는 분명하다. 영어텍스트를 부수는 행위는 언어의 지배관계를 재배치하기 위한 선행 과정으로 볼 수 있다. 전주연이 언어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는 자신만의 언어를 만들기 위함이 아니라 지배적인 언어의 억압에서 탈주할 수 있는가를 실천하는 하나의 방법일지도 모르겠다. 


전주연이 작업에 날을 세울 수 있으려면 언어에 대한 보다 미시적이고 적극적인 해석과 주장을 가져야 할 것 같다. 언어의 추상화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지는 곧 작가의 입장과 태도에 의하여 가능할 터이니 말이다. 특히 순문학이 아닌 조형예술의 형식 안에서 언어를 사용하기에 어떻게 문학과 미술 사이의 틈새를 제시할 수 있을지 앞으로의 탐구와 실험이 어떻게 진행될지 궁금하다. 언어를 부수는 것은 일차적으로 언어의 명령을 따르지 않겠다는 정치적 선언과 실천의 의지를 표명한다. 그런데 과연 거기에서 멈출 것인가, 아니면 카프카와 같은 소수적 문학을 실천할 것인가? 이미 <Anabasis>(2017)에서 전주연은 텍스트의 탈영토가 어떻게 일어날 수 있는지를 실험한 바 있다. 이 작업은 텍스트를 스텐실로 만든 후, 그 여백 안에 잉크를 묻힌 표면 위에 유토를 굴려 글씨를 인쇄하는 대항-판화 방식으로 텍스트의 정보와 형태를 유실시킨다. 결국 얼룩이 된 글자의 흔적을 품은 언어의 덩어리가 생산된다. 전주연은 다양한 매체 사이를 횡단하며 언어와 의미 사이의 관계를 실험하는 중이다. 언어에 대한 이 같은 집착은 역설적으로 언어로부터의 탈주를 모색하는 지속적인 실천으로 나타난다. 요컨대 일련의 과정은 언어의 완전한 탈주가 목적이 아니라 과연 언어란 무엇이며 개인, 사회, 삶에 어떠한 영향을 주는 가에 관한 실험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정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