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과 태양, 글의 외투 벗기기
전주연의 작업은 이미지가 아닌 글을 출발점으로 한다. 모국어가 아닌 언어로 철학을 전공한 작가는 대부분의 사람들보다 훨씬 더 자주, 그리고 훨씬 더 높은 언어의 장벽에 부딪히며 언어라는 도구가 가진 편리함과 명쾌함이 주는 밝은 외면보다는 그것에 내가 원하는 것을 다 담을 수 없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것에 남이 담은 의미를 내가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허망한 본질을 가까이 체감하며 살아왔을 것이다. 이것은 상당히 오랜 시간 큰 강도로 경험한 것이기에, 작가는 텍스트가 아닌 이미지를 다루는 것으로 삶의 방향을 전환한 이후에도 줄곧 텍스트를 주제로 작업해 왔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전주연의 작업은 때로는 텍스트의 구조를 딛고 서려는 호기로움으로, 때로는 텍스트의 바깥에 서서 이를 해체하려는 시도로, 때로는 그 막막함 자체를 드러내거나 또는 한 자락이라도 움켜쥐어보려는 지난하고 수행적인 동작으로 점점 구체화되었다.
작업을 막 시작하던 때 작가는 서양 철학의 정전으로 여겨지는, 그의 앞에 커다란 벽처럼 놓여있던 텍스트들을 첫 주제로 삼았다. 텍스트를 그것이 올려진 종이에서 도려내어 잔디처럼 바닥에 심고 그 위에서 여러 가지 운동을 하며 뛰어놀거나(<Field of Study>, 2017), 기다란 각목 위에 한줄씩 쓴 텍스트를 차곡차곡 쌓아나간 뒤 그것을 바라보고 줄넘기를 하며 쳐서 쓰러뜨려 보기도 했다(<Hitting>, 2018). “말을 잘 하는 사람보다는 춤을 잘 추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작가가 언어에 수평성을 부여하고 이를 해체해 보려고 진행했던 퍼포먼스들에 수반된 움직임은 다분히 유희적으로 보였지만 동시에 수행적이기도 했다. 커다랗게 분 풍선 450개에 일일이 글을 쓴 뒤 바람을 빼 알아볼 수 없게 만든 흔적들을 줄이어 전시했던 <Aerotext>(2017)나, 텍스트를 도려내고 남은 종이를 흑연 위에 덮고 그 위에서 커다란 유토를 끝없이 굴려 검은 돌을 만들어 냈던, 그리고 이를 반으로 잘라 툭 제시했던 <Anabasis>에서 보거나 짐작할 수 있는 작가의 동작은 구도적이기까지 했다.
텍스트 위에서 커다란 풍선을 가지고 공놀이를 한 즐거운 흔적과, 100킬로그램의 유토를 굴리고 또 굴려 만들어낸 검은 공은 매한가지로 모두 알아볼 수 없는 결과물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Anabasis>는 유독 무심해 보인다. 구도의 심정으로 표면 아래에 감추어진 의미를 끌어올려보려는 노력은 텍스트를 짓밟아버리려는 호기로운 시도만큼이나 속절없이, 읽어낼 수 없는 결과물로 귀속된다. 이렇게 만들어진 검은 공의 단면에는 그것이 흡수한 텍스트의 흔적이 마치 대리석처럼 너울지는 검은 모양들로, 매번 자를 때 마다 다르게 찍혀있을 뿐이었다. 마치 많은 고민과 정제 끝에 뱉어냈지만, 결국 모두에게 다르게 받아들여지는 글이나 말 처럼 말이다.
작가가 언어에 천착하는 이유가 언어에서 의미를 추출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기인한 것인지 그것에 실패한 데서 맛본 좌절감에서 기인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그렇지만 자신의 신체를 사용하여 텍스트의 모양과 구조를 무너뜨리고 알아볼 수 없는 것으로 만드는 전주연의 작업은 언어의 구조를 파괴하고 자의적으로 조합해 알아볼 수없는 결과물을 만들었던 후기구조주의 철학자들의 ‘해체적 글쓰기’를 육화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작가가 가지고 있었던 텍스트에 대한 애호와 갈망은 동시에 언어가 만들어낸 구조의 바깥에 있고 싶은 욕구이기도 하다. 언어의 구조 바깥에 서기 위하여 언어 자체를 이용했던 작가는 이제 그 구조 바깥에 있는 것을 재료 삼고자 한다. 글과 말의 반대편에 있는 것, 바로 이미지이다. 여전히 우리는 이 이미지에 ‘시각 언어’라는 이름을 붙이고는 있지만 말이다. 이솝 우화 중 <바람과 태양>을 생각하며, 필자에게는 그간 전주연의 텍스트 작업이 언어가 가지고 있는 견고한 옹성을 무너뜨리기 위해 거세게 불었던 (그러나 결국 나그네의 겉옷을 벗기는 데는 실패했던) 차가운 바람 같은 작업이었다면, 새롭게 시도한 이미지 작업은 언어의 바깥에서 큰 힘을 들이지 않고도 그것의 외투를 벗겨 내고 마는 따뜻한 태양볕처럼 보였다.
글이라는 그릇에 담지 못하고 넘쳐버린 것들을 이미지에는 담을 수 있을까? 혹은 글이라는 체로 건지지 못하고 가라앉은 것들을 이미지로는 포섭할 수 있을까? 전주연 작가가 새롭게 시작한 이미지 작업은 크게 두 가지 갈래로 나눌 수 있다. 그 중 첫 번째는 그가 지난 1년간 몸담았던 인천 OCI레지던시 근처를 산책하며 찍은 사진들을 활용한 <묽은 프로젝트>(2020)이다. 작가는 목적 없이 산책하는 과정 속에서 눈에 들어온 의미 없는 풍경들을 차곡차곡 사진으로 찍고, 이렇게 포착한 이미지들을 잉크가 스미지 않는 트레팔지 위에 인쇄했다. 작가가 포착한 장면들은 기름을 먹인 듯한 종이 위에 처음에는 선명하게 올라섰으나, 결국 정착하지 못하고 서서히 알아볼 수 없는 모양으로 퍼져 간다. 오랜 시간이 지나면 이미지의 운동이 멈춘 것 처럼 보이겠지만 실상은 물 위에 떠 있는 기름처럼 표면 위를 천천히 부유할 것이다. 사실은 아주 아주 되직한 액체라서 아주 서서히 흘러내리고 있다는 유리처럼 말이다.
이렇게 완성된 풍경은 작가가 실제로 본 풍경의 모습과 전혀 닮지 않았다. 처음에는 또렷하게 각인되었을 이미지들은 여러 차례 번지고 흘러내리고 퍼지면서 마치 기억이 흐려지듯 점차 불명확해지고, 어디서 찍은 사진인지 분간할 수 없는 지경으로 어스러져 종국에는 아스라한 색면들의 혼합으로 분한다. 작가는 수백 개의 풍선 위에 텍스트를 쓰고 바람을 빼던 때와 마찬가지의 태도로, 많은 양의 이미지들을 높낮이를 조금씩 달리한 바닥에 늘어놓고 고정되지 않고 부유하는 이미지의 물결을 만들어낸다. ‘어떤 것이 거기 있었다는 분명한 증거’로 사용되고는 했던 ‘사진’이라는 지표적 매체가 여기에서는 추상 회화와 다름 없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어지는 작가의 두 번째 시도 <묽은 드로잉>(2020)은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가장 오래되고 당연한 방식, 즉 회화다. 작가는 아무것도 닮지 않은, 그러므로 아무것도 지시하지 않는 화면을 만들려고 한 것 같다. 행여 습관적으로라도 무언가를 닮게 만들어버릴 가능성을 없애려는 듯, 그는 갓 물감을 바른 캔버스 위에 물을 뿌려댔다. 이제 화면 위에는 우연히 만들어진 물자국과 그것이 만들어낸 색의 변화만이 존재한다. 작업을 해 나가는 유희적인 과정이 연상되는 이 작업은 이전에 텍스트로 만든 잔디 위에서 공놀이를 하거나 체조를 했던 <Field of Study>를 떠올리게 한다. 지시적인 이미지를 지워내는 과정은 이미 배운 것을 돌이켜 잊는 과정과 궤를 같이 하기 때문이다.
작가는 여전히 텍스트를 놓지 못한 것일까, 여러 점의 <묽은 드로잉>들은 캔버스와 동일한 크기의 종이 위에 쓴 텍스트 작업 <묽은 텍스트>(2020)와 짝을 이룬다. 작가노트를 필사한 <묽은 텍스트>는 글씨 자체를 이미지로 받아들이려는 시도로 보이기도 하지만, 작가가 언어 밖에서도 여전히 언어를 생각하고 있음을 방증하기도 한다. 이 병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2019년에 발간된 <우편엽서- 유령숨>을 살펴보아야 한다. <우편엽서- 유령숨>은 작가가 친구이자 문필가인 엘린과 함께 가명으로 출간한 책이다. 동료가 쓴 난해한 텍스트를 보고 낙서처럼 그린 그림에 반응하여 다시 텍스트가 만들어지는 연속적인 대화 과정을 나란히 병치한 글과 이미지들은 어느 것 하나 명징하거나 정확한 언어라고 할 수는 없었다. 마찬가지로 <묽은 텍스트>에서 작가가 새롭게 사용하는 텍스트 또한 이미지를 보완한다거나 세계를 파악하려는 수단이 아닌, 내면을 읊조리는 도구로서의 역할을 한다. 작가의 말을 빌자면 “원본의 세계에서 독립된 자국”으로서, 오히려 언어의 불가능성을 증명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 남선우